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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에세이

[하느님의 눈짓] 22. 생명의 방향성

세상의 변화란 특정한 목적의 방향 없이, 우연히 생기는 것의 인과관계로만 이루어진다는 생각을 근대적이고 과학적 태도라고 말하곤 합니다. 그렇지만 새로움이 끊임없이 발생하는 자연을 관찰해보면, 그 변화에는 뚜렷한 방향과 목적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지표면을 기준으로 나무는 반대 방향으로 자랍니다. 줄기와 잎, 꽃은 중력을 거슬러 하늘을 향하는 반면, 뿌리는 중력 방향으로 땅을 파고듭니다. 위로 뻗은 줄기와 잎은 빛으로 양분을 만들며 대기 중에 산소를 공급하고, 물과 땅속의 영양분을 흡수하는 뿌리는 나무가 세상에 굳건히 설 수 있도록 지탱하는 역할을 합니다. 이리저리 감아가며 자라는 덩굴나무 또한 칡은 오른쪽, 등나무는 왼쪽으로 도는 것을 보면 방향성이란 생명의 기본 요소라고 생각됩니다.

화단을 가꾸다 보면 계절에 따른 변화뿐 아니라 해마다 영역을 장악하는 풀도 바뀌는 것을 봅니다. 어느 해에는 개망초가 온통 화단과 텃밭을 덮다가, 또 어떤 해에는 명아주와 씨름을 하게 되고, 흙에 납작 엎드려 번져가는 쇠비름도 세력이 강한 해와 약한 해가 있습니다. 화단 모습은 가꾸는 사람의 지향이 반영되어 조금씩 바뀌어 갑니다. 장미나 작약처럼 꽃을 보고 싶은 화초나, 때를 알려주는 매실나무와 영산홍, 마당을 향기로 차게 하는 라일락처럼, 특정한 기억이나 목적을 갖고 심은 것은 관심을 두고 가꾸어 갑니다. 그렇지만, 개성 없이 흔하게 올라오는 풀이나, 탐욕스럽게 번식하며 화단을 뒤덮는 것, 그리고 전체와 조화롭지 못한 화초들은 솎아내게 됩니다.

일정한 의지를 갖추고 화단을 가꾸어 가듯이, 세상의 창조물을 일정한 방향으로 이끌어 가꾸시는 창조주 하느님의 존재를 미루어 짐작해 봅니다. 그분은 내가 세상에서 만나는 모든 사람과 자연, 사물과 사건을 통해, 당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한 걸음씩 설득하며 가꾸는 존재이기도 합니다. 삶은 시간과 방향성을 동시에 갖습니다. 시간이라는 한 축의 흐름 위에서 매 순간 설득하시는 하느님과 그에 반응하였던 응답이 만들어낸 삶의 궤적을 생각해 봅니다. 반항, 무관심, 머뭇거림으로 비틀거린 순간들은 하느님의 방향과 얼마나 떨어져 있었을까요. 신앙은 우리가 우연이라는 바다에서 맥없이 부유하는 존재가 아니라, 선한 의지의 하느님과 일치를 향하는 목적이 있는 존재임을 일깨워 줍니다. 그러므로 창조 세계를 향한 하느님의 질서와 의지를 인식할 수 있는 성찰의 책임이 인간에게 있는 것을 모른 척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어느 날 밭의 경계를 따라 제초제를 뿌리는 옆집을 보았습니다. 경계를 알 리 없는 풀과 화초의 뿌리가 땅을 넘어 자신이 소유한 밭의 영양분을 빼앗는 것이 마음 쓰였나 봅니다. 내 밭을 잘 가꾸기 위한 마음은 이해되지만, 화학물질로 금을 긋는 행위에서 아직 함께 살아가는 마음까지 도달하진 못한 모습을 봅니다. 소유를 의식하는 마음이 자연을 가꾸는 마음마저 단절합니다. 창조의 주인이 있는 세상에서 인간은 단지 일정 시간과 공간의 청지기일 뿐임을 체득하는 과정은, 생명이 다할 때까지 계속 해야 할 수련인가 봅니다.

5월 24일에는 프란치스코 교종의 회칙 「찬미받으소서」를 실천하는 ‘7년 여정’의 개막 미사가 주교회의 주재로 명동대성당에서 열렸습니다. 매 순간 일상을 통하여 생태계를 의식하는 실천에 교회가 나서겠다는 다짐을 하는 자리였습니다. 7의 숫자는 하느님의 창조로부터 안식일까지 걸린 시간을 의미합니다. 하느님과 하나 됨을 목적으로 하는 신앙인으로서, 취약해진 자연을 살피시는 하느님의 마음을 따라가는 가정, 교회, 일터이기를 가슴으로 새겨봅니다.

하늘땅물벗 홍태희(스테파노) 반석벗(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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