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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에세이

[생활 속 생태 영성, 하느님의 눈짓] 6. 베란다에서 만난 하느님

거실 넓은 창 앞에서 아내가 연실 중얼댑니다. 전화하고 있는 줄 알았는데 한참이나 혼잣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혼잣말이란 내 생각이고 아내는 꽃하고 뭔가 대화를 하는 중입니다. “그놈이 엎어 놓아서 놀랐는데 다시 자리를 잡았구나. 대견해라. 이제 다시 그 녀석 얼씬 못 하게 해야지….” 엊그제 세 살 먹은 손주가 놀러 와서 화분을 엎었었나 봅니다.

 

몇 해 전 회사에서 점심 먹고 들어오는 길에 자그마한 금전수 화분을 가져다 사무실 한편에 놓아두었습니다. 푸르고 반짝이는 잎으로 출근을 반겨주는 화초가 오랫동안 건조해지기 쉬운 일터에서의 마음을 한결 촉촉하게 해주었습니다. “또 한 줄기가 올라오는구나, 예쁘네, 이제는 햇볕을 이쪽으로 돌려서 맞자.” 청년처럼 부쩍 자란 화초에 나도 모르게 중얼댑니다. 화분에서 자라는 화초지만 사무실 동료들의 관심과 사랑을 받아 한결 윤이 납니다.

 

우리는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고 상대방의 공감을 얻기 위하여 말로 대화를 합니다. 하지만 애완견과 나름의 언어로 대화하며 공감과 위로를 얻고 있는 많은 분이 인간만이 대화를 위한 언어를 갖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증언합니다. 어떤 과학자들은 식물이 내보내는 진동이나 전기적 신호를 감지하고 그것을 해석하여 식물과 대화하는 기술을 개발한다고 합니다. 사실 그것은 인간과 식물의 대화의 문제일 뿐 식물들 상호 간에는 향기와 진동과 뿌리의 연결 등을 통한 그들의 언어로 충분히 의사소통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다정한 보살핌의 눈길이라면 화초가 색깔과 모습을 바꾸거나, 냄새를 피우거나, 꽃을 피워내는 것으로 위험하다는 신호나 친밀감을 표현하는 것을 알아보고 그에 응답하는 대화를 나누기 충분합니다.

 

자연과의 특별한 감수성을 갖는 시인이나 신비적 영성가들은 자신들이 감지한 대지의 언어, 바다의 언어, 꽃과 새의 언어를 글이나 다양한 방식으로 세상에 전하고 있습니다. 12세기에 독일 빙엔 지방에 살았던 힐데가르트(1098~1179) 성녀는 대지에서 솟아나는 푸른 생명력인 ‘비리디타스’(viriditas)를 하느님 사랑의 창조력이자 그 질서의 힘으로 감지했습니다. 그리고 생명의 근본을 이루는 ‘비리디타스’를 통해 자연의 모든 동물과 식물 그리고 광물에서조차 하느님의 손길을 경험할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또한, 힐데가르트는 인간의 병이란 자연과의 부조화로 인해 생명의 질서가 무너진 것이므로 스스로 자연을 통해 자신을 치유할 능력을 갖추고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식물과 광물질의 보석을 사용하거나 정원 가꾸기 등의 활동을 통해 자연의 질서와 교감함으로써 생명력을 회복하여 사람의 병든 것을 치유하였습니다. 자연의 생명력과의 교감을 하느님의 치유 은사로 승화시킨 것입니다.

 

추운 겨울을 보내고 조금은 따뜻해진 햇볕을 받는 거실의 군자란이 꽃대를 베어 물었습니다. 좁은 화분의 제한된 환경에서도 생명력을 피워 올리는 그것을 발견하는 순간 수고했다는 말이 절로 나옵니다. 군자란은 자신의 사랑을 매년 꽃을 피움으로 표현하고자 애쓰고 있습니다. 저 꽃대가 올라와 주황빛 꽃 더미를 한껏 쏟아낼 때쯤 되면 자식이 결혼하는 것 같은 대견함에 마음이 환해질 것 같습니다. 시인이나 영성가가 아니더라도 작은 화초와 대화하는 마음으로 그들의 언어에 감수성과 공감을 넓혀간다면 자연의 생명력을 통해 살짝 눈짓해 주시는 하느님을 우리 집 베란다에서도 만날 수 있지 않을까요?

 

하늘땅물벗 홍태희(스테파노) 반석벗(회장)

 

출처: [생활 속 생태 영성, 하느님의 눈짓] 6. 베란다에서 만난 하느님 | 가톨릭평화신문 (cpbc.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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