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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에세이

[생활 속 생태 영성, 하느님의 눈짓] 5. 정주(定住)하는 삶

아파트 엘리베이터 안에서 자주 보는 분과 목례를 나누었습니다. 그런데 낯이 익은 이웃이란 것은 알고 있지만 사실 몇 호에 사는 분인지는 모릅니다. 이곳으로 이사 온 지 10년이 되어가지만, 따로 이야기를 나누어 본 적이 없습니다. 어쩌면 아는 척을 하지 않는 것이 아파트 생활의 예의라고 생각하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되돌아 생각해 보니 결혼 이후 가족을 꾸리면서 30년 동안 집을 옮긴 횟수가 열네 번입니다. 세계화의 시대는 싫든 좋든 일을 따라 여행을 하거나 거주지를 옮길 수밖에 없도록 하였습니다. 서울뿐 아니라 경기도, 충청도, 경상도에 미국까지 옮겨 다니며 어느 한 곳에 정착할 틈이 없었습니다. 몇십 년을 살아도 고향이 되지 못하는 도시의 삶은 몸뿐 아니라 마음도 머물지 못하는 불안감을 키워왔습니다. 내가 살고 있는 장소가 잠시 머물다 곧 떠날 곳이라 생각하니 이웃과의 소통도 형식적인 정도에 머물 수밖에 없었던 것 같습니다. 문명 비평가들은 이러한 현대의 상황을 ‘노마드(nomad)’라 칭하는 새로운 유목민의 시대라고 합니다.

 

교회의 역사에서 제대로 규칙을 갖춘 수도회가 생기기 전, 한곳에 머무르지 못하고 여러 지방을 돌아다니며 자기의 주장에 빠져있던 ‘기로바꾸스’(girovagus)라는 떠돌이 수도승들이 있었습니다. 성 베네딕토는 이들을 악한 수도승이라고 단호하게 반대하면서 수도회 규칙에 ‘정주’(定住) 서원’을 추가하였습니다. 한곳에 머물러 살며 그곳의 환경을 돌보고 자연의 변화를 감지하며 땅을 세심하게 보살피는 것이 하느님을 흠숭하는 자세로 본 것입니다. 장소적 정주는 내가 살고 있는 지역에서 현실적으로 접촉하며 긴밀한 관계를 갖는 것들과 역사를 나누며 함께 살아간다는 소속감과 책임감을 갖게 합니다. 그로 인해 이웃과 자연이 타자로서가 아니라 나와 긴밀하게 연결된 생존의 공동체라는 것을 체험하게 됩니다.

 

바이러스로 인한 팬데믹의 상황으로 급속히 진행되던 세계화와 유목민적 생활방식은 제동이 걸렸습니다. 각 나라가 제각기 문단속을 강화하는 바람에 관광뿐 아니라 업무를 위한 여행도 발목이 잡혔습니다. 저 역시 아내와 계획했던 해외성지순례도 포기할 수밖에 없게 되었고 해외로 출장 가던 업무도 이제 인터넷으로 해결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비행기를 타고 방문하지 않고는 해결할 수 없을 것 같던 일들도 그럭저럭 방법을 찾아 나가는 것이 신기하기만 합니다. 한 곳에 뿌리를 못 내리고 정복할 곳을 찾아 끊임없이 헤매던 인간의 욕심을 하느님은 바이러스를 통해 경고하고 계신 듯합니다. 현대의 유목민들은 이제 정주를 심각하게 생각해야 할 때가 된 것 같습니다.

 

인생의 여정에서 가족을 꾸리고 자식들의 성장을 돌보며 생업에 충실하던 시기도 마무리되는 60대의 초입에서 앞으로 남겨진 적지 않은 시간을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를 생각해 봅니다. 이제는 머물러 사는 삶이 마음에 와 닿습니다. 정주하는 삶이란 많은 기회를 포기하는 삶이기도 합니다. 베네딕토 성인은 생태적 방식으로 정주하는 삶에서 일상의 모든 것으로부터 하느님을 느끼는 겸손한 자각을 강조하였습니다. 귀촌의 방식으로 정주를 꿈꾸기도 하지만 도시에서 정주하는 삶도 의미가 있어 보입니다. 내가 살고 있는 장소에 애정을 갖고 그곳의 모든 생명체가 조화롭게 함께 살도록 주변 환경을 보살피며 다음 세대에게 오염되고 고갈되지 않은 땅을 전해 주려는 절제되고 겸손한 마음가짐으로 살아간다면 이미 우리는 정주의 영성으로 살고 있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하늘땅물벗 홍태희(스테파노) 반석벗(회장)

 

출처: [생활 속 생태 영성, 하느님의 눈짓] 5. 정주(定住)하는 삶 | 가톨릭평화신문 (cpbc.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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