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회원가입
못자리벗 벗소식

하늘땅물벗 모임 길잡이(5)

과연 만물이 그분에게서 나와, 그분을 통하여 그분을 향하여 나아갑니다. 그분께 영원토록 영광이 있기를 빕니다. 아멘.”(로마 11,36)

만물의 근원이신 주님, 인간을 위하여 주님께서 만들어 주신 세상, 아름다운 푸른 지구, 그 지구의 한편에선 넘쳐 나는 재화와 끝없는 탐욕, 또 다른 한편에선 헐벗고 굶주린 이들의 울부짖음.

지구의 아름다움을 편리성과 맞바꾸고, 지구의 푸르름을 이윤으로 대체하면서, 주님 내신 세상이 어떤 꼴이 되었는지, 아마도 주님은 하 기가 막혀 하시겠지요.

주님에게서 나온 만물은 주님을 통하여 주님께 나아가야 하는데, 우리 오만한 인간으로 말미암아 만물은 갈 길을 잃었습니다.

주님, 이제라도 우리의 굳고 비뚤어진 마음을 돌리시어, 만물이 아름다운 모습을 되찾고 제 길을 갈 수 있도록, 그리하여 주님 영광 영원할 수 있도록 하여 주십시오.

영원 생명이신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1. 회칙 「백주년」에 “인간은 땅을 개발할 수는 있어도 저버려서는 안 된다.”는 구절이 나옵니다. 주변에서 땅을 저버린 사례를 찾아서 이야기를 나눠 봅시다.
  2. 그리스도인은 겉으로 드러난 현상뿐 아니라 그 안에 숨겨진 시대의 표징을 읽어야 합니다. 코로나19 바이러스로 고통 받는 세상과 관련해서, 본문에는 거기에 담긴 표징을 설명할 수 있는 구절이 여러 군데 나옵니다. 각자 하나씩 찾아서 말해 봅시다.
  3. 오늘 읽은 내용 중 특히 마음에 와 닿은 구절이 있으면 나누어 봅시다.

– 개인별 실천:

– 공동 실천:

저의 주님, 찬미받으소서. 주님의 모든 피조물과 함께, 특히 형제인 태양으로 찬미받으소서.

태양은 낮이 되고 주님께서는 태양을 통하여 우리에게 빛을 주시나이다.

태양은 아름답고 찬란한 광채를 내며 지극히 높으신 주님의 모습을 담고 있나이다.

저의 주님, 찬미받으소서. 누이인 달과 별들로 찬미받으소서.

주님께서는 하늘에 달과 별들을 맑고 사랑스럽고 아름답게 지으셨나이다.

저의 주님, 찬미받으소서. 형제인 바람과 공기로, 흐리거나 맑은 온갖 날씨로 찬미받으소서.

주님께서는 이들을 통하여 피조물들을 길러 주시나이다.

저의 주님, 찬미받으소서. 누이인 물로 찬미받으소서.

물은 유용하고 겸손하며 귀하고 순결하나이다.

저의 주님, 찬미받으소서. 형제인 불로 찬미받으소서.

주님께서는 불로 밤을 밝혀 주시나이다. 불은 아름답고 쾌활하며 활발하고 강하나이다.

아멘.

=============================================

교황청 정의평화평의회(2000년 11월 24일)

 

창조 보전 : 인간 활동과 환경 (Care for Creation : Human Activity and the Environment)

오늘날의 환경 문제: 인간과 세상의 관계 (후반부)

가톨릭 교회의 사회 교리를 바탕으로 한 접근법

이번에는 인간과 세상의 관계를 로마 가톨릭 교회의 사회 교리의 관점에서 살펴보도록 합시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말씀에 따르면, 교회의 사회 교리는 “현대 사회의 관계 자체의 복잡한 구조 안에 들어 있는 인간에 대하여 관심을 보입니다.” 교리는 “복음 요청이 사회생활에서 일어나는 문제들과 마주치는 데에서 발생합니다.” 다시 말하여, 이 교리는 인간과 세상의 관계에 직접 관련되어 있습니다.

생태 위기는 윤리 위기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께서는 1990년 세계 평화의 날 담화 ‘창조주 하느님과 함께하는 평화, 모든 피조물과 함께 하는 평화’에서 환경 파괴는 “심각한 도덕적 위기의 한 난국일 뿐”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그 다음 해에 나온 회칙 「백주년」에서 교황 성하께서는 이 위기의 뿌리를 더욱 상세하게 밝히십니다. 그것은 불행히도 오늘날 널리 퍼져 있는 인간학적 오류의 결과입니다. 

자신의 노동으로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고 어떤 의미에서는 세상을 ‘창조할’ 수 있다고 알아듣는 인간은, 그 노동이 언제나 하느님께서 베풀어 주신 사물들의 원초적인 선물에 기초하고 있다는 것을 망각한다. 인간은 마치 땅이 그 자체의 요구 조건도, 하느님께서 주신 목적도 없는 것처럼, 땅을 자신의 의지에 종속시키면서 향유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 인간은 땅을 개발할 수는 있어도 저버려서는 안 된다. 인간은 창조 활동에서 하느님의 협조자로서 역할을 수행하는 대신, 부당하게 하느님의 자리에 자신을 올려놓음으로써 자연의 반란을 불러일으키고, 자연을 다스리기보다는 학대한다.

이 부분은 분명히 성서의 내용을 반향합니다. 한 마디로 말하면, 인간은 자기 존재의 진실을 잊었으며 그 결과 세상은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

위의 내용에 비추어 연구할 수 있는 교회의 사회 교리의 몇 가지 기본 원칙들 가운데에는 인간 중심성, 창조된 재화의 보편적 용도, 그리고 연대성이 있습니다.

세상 안에서 인간의 위치

가톨릭 교회는 인간에 대한 진리에 비추어 세상에 대한 인간 중심성을 주장합니다. 사실 인간은 존재론적 측면에서 나머지 피조물들과 다릅니다. 이것은 추상적인 주장이라기보다는 하나의 행동 원리이며, 인간 활동으로 일어나는 세상의 변화나 수정은 이를 신중하게 고려하여야 합니다. “생명의 존중, 그 무엇보다도 인간 존엄성의 존중은 건실한 경제, 산업과 과학 발전을 위한 궁극적인 지도 규범입니다.” 이윤과 재화 생산 또는 재화 축적, 그리고 과학 발전은 그 자체로 목적이 될 수 없습니다. 모든 참된 진보의 궁극적인 기준은 인간과 개개인의 선, 인류와 인류의 공동선입니다.

인간, 그 가운데에서도 하느님께서 사랑하시는 가장 가난한 이들의 관점에서 이해되는 발전은 명백히 인간이 살고 있는 환경에 관심을 가지는 것이어야 합니다. 환경을 파괴하는 것은 인간을 해치는 일이며 동시에 자기 나름의 자율성을 가지고 있는 창조된 세상을 해치는 일입니다.

지상 재화의 사용

인간은 자기 마음대로 지상의 재화를 사용할 수 없습니다. 그렇게 될 때 다시 위험에 빠지는 것은 인간이며, 우주에는 반드시 지켜야 할 질서가 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 피조물들에게 완전성과 고유하고 역동적인 내적 균형을 주셨습니다. 인간이 지성과 자유 의지를 부여받고 세상을 변화시키도록 부름 받았기는 하지만, 세상을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는 전권을 가진 것처럼 행동할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인간은 “하느님을 위해서 함께 일하는 일꾼”이며 “하느님과 함께 일하는 사람”입니다. 인간의 소명은 세상의 가장 작은 부분부터 가장 거대한 부분까지, 가장 가까운 것부터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것까지 꼼꼼하게 살펴보고 그 안에서 각 존재의 본성 안에 새겨져 있는 하느님의 계획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계획하신 이러한 질서를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무시하면 그 미묘한 균형은 깨어지며, 지상에도 막을 수 없는 엄청난 영향을 미칩니다.

인간 행위의 제약

그러므로 인간은 세상 안에서 행동할 때 제한된 권리를 가집니다. 우리는 천연 자원을 비롯한 지상의 재화에 대해서 우리가 절대적인 힘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마음대로 사용할 수는 없습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께서는 이 원칙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십니다.

인류 가족에 참으로 도움이 되는 방식으로 피조물을 지배하는 것은 우리 인간 존엄성의 요구이며 따라서 중대한 책임이기도 합니다. 풍부한 자연을 이용할 때에는 사람들의 눈앞의 필요뿐 아니라 미래 세대의 필요도 배려하는 기준을 따라야 합니다. 그럴 때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맡기신 자연에 대한 관리 임무는 근시안적인 태도나 이기적인 추구에 이끌리지 않게 될 것이고, 모든 창조된 재화는 모든 인류의 선익을 위한 것이라는 사실을 고려할 수 있게 됩니다. 자연 자원의 사용은 현재와 미래 세대의 전체적인 발전에 도움이 될 것을 목적으로 하여야 합니다.

교황 바오로 6세께서는 “모든 것은 서로 관련되어 있다.”고 하시며, “창조주의 사랑의 계획에 따라 온갖 조화로운 풍요 안에서 인간의 손에 맡겨진 자연의 균형에 인간의 모든 개입이 가져오는 광범위한 결과”를 우리가 주의 깊게 바라보아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을 대신하는 인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께서도 말씀하신 적이 있는, 인간에 대한 진리를 부정하는 인간학적 오류는 결국 일종의 드러나지 않는 우상 숭배입니다. 인간은 하느님 없이 지내면서 하느님을 대신하기로, 말하자면 자신의 형상에 따라 만들어진 세상에서 스스로 중심이 되기로 마음먹습니다. 모든 것은 흔히 자발적으로 생겨난 자신의 욕구를 채워야만 하는 이러한 인간과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이러한 욕구를 채우면서 인간은 다른 이들이나 미래 세대를 생각하지 않고 재화를 사용하고 남용하며 고립되어 자신 안에 갇혀 있습니다. 이러한 인간이 많다는 것도 불행입니다.

사실 어떤 사회들은, 특히 서구에서는 낭비를 가져오는 소비 모형을 채택해 왔습니다. 무절제한 이윤 추구는 그러한 생활 방식의 원동력이 될 수 있습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말씀은 이런 면에서 특히 엄격합니다.

소수의 특권층이 계속하여 과도한 재화를 축적해 가고 유용한 자원을 탕진하고 있는데도 대다수의 민중은 바로 생존의 최저 수준에서 비참하게 살아가야 한다는 것은 명백한 불의입니다. 오늘날 생태계의 붕괴라는 이 비극적인 징조는 개인적이든 집단적이든 탐욕과 이기심이 창조의 질서, 곧 상호 의존성을 그 특징으로 하는 창조 질서와 얼마나 상반되는지를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사용할 수 있는 가능한 방법들 곧 교육, 법적인 조치, 국제 협력과 같은 수단으로 환경 위기의 징후들에 대처하고 있지만, 문제의 근원은 다른 곳에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문제의 뿌리는 바로 신앙과 윤리의 차원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환경 문제를 제기하고 적절한 해결책을 찾는 일에 동참할 때, 교회는 자신의 완전한 권리를 가집니다.

결 론

마지막으로, 모든 피조물 안에서 하느님의 영광을 찬미하는 인간의 모습에 대해서 잠시 생각해 봅시다. 지극히 복잡하고 광적인 현대 사회에서 세상을 하느님의 피조물로서 관상하는 것은 환경 보호에서 중요하고 결정적인 요소입니다. 이러한 관상은 하느님께 대한 우리의 생각을 들어 높이고 나아가 창조주 하느님과 직접적으로 관계를 맺도록 도와주며, 인간을 재창조하고 새롭게 합니다. 하느님과 맺는 이러한 생생한 관계에 따라, 인간은 하느님께서 그토록 사랑하시는 세상, 하느님의 영광을 찬양하는 방법을 아는 세상을 관심과 존중으로 다루지 않을 수 없습니다. 어떻게 우리가 인간의 무질서로 혼탁해진 이 세상을 영광스럽게 빛나도록 만들려는 열망에 사로잡히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렇게 되면 우리는 마치 거울처럼 모든 사물 안에서 당신 피조물에 대한 창조주의 사랑을 비추어 볼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성인은 세상과 하느님의 사랑에 사로잡힌 인간 사이의 이러한 신비로운 관계를 완전히 이해하였습니다. 때때로 프란치스코 성인은 너무 단순하고 순박하여 우리의 복잡한 현대 지성을 만족시킬 수 없는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의 고난, 그의 힘든 참회 생활, 그의 오랜 관상, 그 시대의 도전에 맞선 용기를 너무 쉽게 지나쳐 버립니다. 하느님께 온전히 바친 이러한 삶의 결과는 무엇이었습니까? 동물들이 그들의 친구로 여긴 사람, 해와 달을 가족으로 여긴 사람, 자신이 가진 것을 모두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어 버리고 죽음을 자신의 누이라고 말한 탁발의 수도자. 프란치스코 성인은 창조의 깊은 신비, 곧 만물은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창조되었으며 만물은 하느님께 이러한 영광을 바쳐야 한다는 것을 몸소 체험하였습니다.

환경 보호에 관한 가톨릭 교회 전통의 몇몇 요소들을 이렇게 간단하게 소개하며, 마지막으로 우리 함께 모든 피조물이 부르는 영광의 노래를 부릅시다. “모든 것은 그분에게서 나오고 그분으로 말미암고 그분을 위하여 있습니다. 영원토록 영광을 그분께 드립니다. 아멘.”

벗소식 목록 벗마당 메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