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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자리벗 벗소식

하늘땅물벗 모임 길잡이(4)

 

나는 또 새 하늘과 새 땅을 보았습니다. 첫 번째 하늘과 첫 번째 땅은 사라지고 바다도 더 이상 없었습니다. 그리고 거룩한 도성 새 예루살렘이 신랑을 위하여 단정한 신부처럼 차리고 하늘로부터 하느님에게서 내려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때에 나는 어좌에서 큰 목소리를 들었습니다. “보라, 이제 하느님의 거처는 사람들 가운데에 있다. 하느님께서 사람들과 함께 거처하시고 그들은 하느님의 백성이 될 것이다. ”(묵시 1-3)

 

그리스도인들이 피조물과 함께 드리는 기도(전반부)

 

하느님 아버지,

모든 피조물과 함께 찬미하나이다.

전능하신 성부께서 손수 빚으신

모든 피조물은 아버지의 것이고

아버지의 현존과 자애로 충만하나이다.

찬미받으소서!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예수님,

만물이 당신을 통하여 창조되었나이다.

성자께서는 성모 마리아께 잉태되시어

이 땅에 속하셨으며

인간의 눈으로 이 세상을 바라보셨나이다.

성자께서는 오늘도 당신 부활의 영광 안에서

모든 피조물 안에 살아계시나이다.

찬미받으소서!

 

성령님, 성령께서는 당신의 빛으로

이 세상을 아버지의 사랑으로 이끄시며

고통 가운데 신음하는 피조물과 함께하시나이다.

성령께서는 또한 저희 마음 안에 머무르시며

저희를 선으로 이끄시나이다.

찬미받으소서!

 

삼위일체이신 주 하느님,

무한한 사랑의 놀라운 공동체를 이루시니

만물이 하느님을 이야기하는 세상의 아름다움 안에서

저희가 하느님을 바라보도록 가르쳐 주소서.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존재를 통하여

저희의 찬미와 감사를 일깨워 주소서.

존재하는 모든 것과 친밀한 일치를 느끼도록

저희에게 은총을 내려 주소서. 아멘.

 

‘오늘날의 환경 문제: 인간과 세상의 관계’ 전반부

  1. 지금 전 세계는 기후 위기 극복을 위해 환경 파괴를 막아야 한다는 데 동의합니다. 인간과 세상이 불가분의 관계에 있기 때문인데, 인간과 세상의 관계를 바라보는 그리스도인의 관점과 비그리스도인의 관점은 어떻게 다를까요?
  2. 여러분이 마음속에 그리는 ‘새로운 창조’, ‘새 하늘과 새 땅’은 어떤 모습입니까?
  3. 오늘 읽은 내용 중 특히 마음에 와 닿은 구절이 있으면 나누어 봅시다.

– 개인별 실천:

– 공동 실천:

 

사랑의 하느님,

이 세상에 저희에게 맞갖은 자리를 보여 주시어

저희가 이 땅에 있는 모든 것을 위한

하느님 사랑의 도구가 되게 하소서.

하느님께서 기억하지 않으시는 존재는

하나도 없기 때문이옵니다.

권력과 재물을 가진 이들을 깨우치시어

무관심의 죄에 떨어지지 않게 하시고

공동선을 사랑하며 약한 이들을 도와주고

저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을 돌보게 하소서.

가난한 이들과 지구가 부르짖고 있나이다.

 

주님,

주님의 힘과 빛으로 저희를 붙잡아 주시어

저희가 모든 생명을 보호하며

더 나은 미래를 마련하여

정의와 평화와 사랑과 아름다움의

하느님 나라가 오게 하소서.

찬미받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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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청 정의평화평의회(2000년 11월 24일)

 

창조 보전 : 인간 활동과 환경

(Care for Creation : Human Activity and the Environment)

마조리 키난 수녀

(마조리 키난(Sr. Marjorie Keenan, 성모성심수녀회) 수녀는 교황청 정의평화평의회와 오랜 관계를 맺고 있다. 교황 바오로 6세는 1976년 그를 본 평의회의 회원으로 임명하였고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연임을 명령하였다. 마조리 수녀는 1986년부터 2000년까지 로마에서 본 평의회의 직원으로 일하였다.)

 

오늘날의 환경 문제: 인간과 세상의 관계*

인간과 세상의 관계에 대하여 말하려는 것은 하느님의 생명의 신비 속으로 들어가는 큰 용기가 필요하다는 의미를 갖습니다. 인간과 세상은 성삼위와 모든 피조물이 맺고 있는 밀접한 관계를 숙고하거나 나아가 관상하지 않고서는 완전한 의미를 지닐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환경 문제는 실제로 우리에게 새롭고 관심어린 눈으로 하느님께서 창조에 대하여 우리에게 계시해 주신 것들을 다시 돌아보도록 요구합니다.

이러한 관계는 로마 가톨릭 전통에 의지하며, 우리를 시간의 한처음으로 돌아가게 해 놓고는 근본적으로 마지막 시간으로 향하게 하는 ①성서 본문들을 짧게 성찰하는 데에서 시작합니다. 우리는 함께 하느님의 창조 계획을 잠시 명상하고 관상한 다음, 우리 현대인이 피조물 안에서 그리고 피조물과 관련하여 차지하는 위치를 알 수 있도록 하느님께서 보셨던 대로 세상을 바라보고자 노력할 것입니다. 그런 다음, 이 주제에 대한 로마 가톨릭 교회의 ②사회 교리의 몇 가지 근본 원칙들을 제시할 것입니다. 이 두 가지 접근법은 결국 하나로 모아지게 되는데, 신념과 행동 곧 철저히 실천하는 신앙과 사회적 행동 사이에는 밀접한 연관이 있기 때문입니다.

 

성서적 접근

성서에 대한 이 짧은 성찰은 주제에 접근하기 위한 하나의 시도에 지나지 않으며, 이것이 창조 신학이나 환경 신학이 될 수는 없습니다. 어떤 특정한 주제를 설명하려고 의도적으로 선택된 본문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문제를 충분히 다루려면 하느님의 말씀 전체를 꼼꼼하게 살펴보고 교회의 오랜 전통을 고려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성찰이 불완전하기는 해도 가치가 없지는 않습니다.

 

하느님과 피조물의 관계

하느님과 피조물의 관계를 먼저 간략하게나마 살펴보지 않고서는 인간과 세상의 관계를 고려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인간과 세상에 대한 우리의 시각이 좁아질 위험이 있습니다. 인간과 세상 모두 그 존재의 가장 근본적인 기원과 단절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수세기 동안 발전되어 온 풍부한 창조 신학에서 우리가 지금 다루는 주제와 직접적인 연관이 있는 세 가지 주장을 이끌어 내려고 합니다. 그 각각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생략하겠습니다.

─ 하느님의 내적 생명(ad intra)은 상관적이다. 곧,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성삼위 사이에는 친교의 관계가 있다.

─ 창조는 이러한 상관적인 생명의 외적 표현(ad extra)으로, 하느님께서 아무 요구 없이 무상으로 계획하신 것이다.

─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것은 선하며 죄가 있음에도 선함을 잃지 않는다. 또한 하느님께서는 피조물 안에서 기뻐하신다.

이러한 세 가지 주장은 인간과 세상의 관계를 생각할 때 빠질 수 없는 배경이 됩니다. 모든 피조물이 하느님께 근본적으로 또한 전적으로 의존하는 한편, 하느님께서는 “참 좋았다.”고 생각하신 당신 피조물들을 사랑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관계에 대하여 말할 때, 창조주 하느님과 맺는 관계를 암시적으로나 명시적으로 언급하여야 합니다.

성서는 우리에게 이러한 근본 진리를 여러 번 반복해서 상기시킵니다. 몇 가지 예만 들어 봅시다. 바오로 사도는 우리에게 “우리는 그분 안에서 숨 쉬고 움직이며 살아간다.”고 일깨워 줍니다. 이것은 단순한 인간의 이성으로는 생각하기 어렵습니다. 시편도 이 놀라운 세상을 기뻐하고 있습니다. “주님 것이로다, 땅이며 그 안에 가득 찬 것이, 온 누리와 거기 있는 그 모든 것이.” 또는 “하늘은 하느님의 영광을 얘기하고, 창공은 그 손수 하신 일을 알려 주도다.”와 같은 구절이 그러합니다. 그리고 피조물의 응답이 곧 뒤따라 나옵니다. “주님께서 다스리시니, 땅이여, 춤을 춰라.” 모든 피조물이 하느님께 영광을 바쳐야 합니다.

 

피조물 가운데서 인간의 위치

이 피조물 가운데서 인간의 위치는 두 가지 축을 가지고 있습니다. 인간은 모든 피조물의 일부이며, 동시에 나머지 모든 피조물과 분명히 구별됩니다. 인간과 세상의 관계를 규정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구별입니다.

두 가지 창조 이야기를 함께 살펴보면, 각자 자기 나름의 방식으로 인간과 나머지 피조물 사이의 근본 차이를 설명합니다. 첫 번째 이야기에서 인간은 온갖 “집짐승과 길짐승과 들짐승”과 같은 날 만들어졌지만 그들과는 성격이 다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모습을 닮은 사람을 만들자.”고 말씀하셨습니다. 성서 저자는 이 창조 행위에 용약하며 그 이야기에 끼어듭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모습대로 사람을 지어 내셨다. 하느님의 모습대로 사람을 지어 내시되 남자와 여자로 지어 내셨다.” 두 번째 이야기는 같은 사실에 대해서, 하느님께서는 진흙으로 사람을 빚어 만드시고 “코에 입김을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되어 숨을 쉬었다.”와 같이 다르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하느님과 특별한 관계에 있습니다. 하느님의 입김으로 생명을 받았으므로, 말하자면 하느님과 “가족의 유대”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은 팽팽한 긴장 안에서 살아갑니다. 한편으로, 인간은 자신의 생명과 생존을 위하여 의존하고 있는 나머지 피조물과 동일시되며, 다른 한편으로는 하느님과 인격적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우리는 모든 사람은 존재의 바로 첫 순간부터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고 살아간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홀로 이러한 긴장 속에 사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인간 사회 자체의 존재 상황입니다.

인간과 나머지 피조물 사이의 또 다른 근본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창조의 순간, 하느님께서는 첫 인류에게 특별한 임무를 맡기셨습니다. 그들은 다른 모든 생물을 “다스리고” 땅을 “정복”해야 했으며, 또는 두 번째 창조 이야기에 따르면 이를 “돌보아야” 했습니다. 또한 그들은 동물들에게 이름을 붙여 주고 다스려야 했습니다. 어느 한 쪽이 다른 쪽에 대한 특권을 갖는 “다스리다”나 “돌보다” 같은 표현들에 대해서는 그냥 넘어가도록 합시다. 기억해야 할 중요한 사실은, 하느님의 모습대로 만들어진 인간은 다른 피조물들과 맺는 관계 안에서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대로 행동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솔로몬의 말에 귀 기울여 봅시다. 솔로몬은 지혜를 얻기 위한 기도를 하면서, 말하자면 이 두 낱말에 특별한 해석을 내렸습니다.

  우리 조상들의 하느님이시며 자비로우신 주님. 당신은 말씀으로 만물을 만드셨고, 당신의 지혜로 인간을 내시어 당신 손에서 생명을 받은 모든 피조물을 지배하게 하셨습니다. 또 인간으로 하여금 세상을 거룩하고 의롭게 다스리게 하시고 정직한 마음으로 통치하게 하셨습니다. 나에게 당신 왕좌에 자리를 같이한 지혜를 주소서.

이것은 오늘날 환경 문제의 심각성을 생각해 볼 때, 우리에게 적용하여야 할 기도입니다.

 

, 그리고 인간과 세상의 관계

하느님께서는 인간에게 나머지 피조물들에 대한 절대력을 주신 적이 없으십니다. 처음부터 하느님께서는 아담과 하와에게 그들이 지상의 재화를 사용할 때 하느님께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음을 일깨우는 어떤 제약을 두셨습니다. “이 동산에 있는 나무 열매는 무엇이든지 마음대로 따 먹어라. 그러나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만은 따 먹지 마라.”

아담이 이 제약을 따르지 않음으로써 죄를 지었을 때, 그는 하느님과 인간뿐 아니라 인간과 세상의 조화로운 관계의 균형을 깨뜨린 것입니다. 이러한 죄 때문에 세상은 실제로 인간에게 적대적인 환경이 되었습니다. 이제 땅은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고, 인간은 이마에 땀을 흘려야 낟알을 얻어먹게 되었습니다. 인간이 하느님을 거스른 것은 또한 땅을 거스른 것이 되었습니다.

다른 성서 구절을 들어 봅시다. 노아의 시대에,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사악함을 보시고 사람뿐 아니라 짐승과 땅 위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모조리 없애기로 하셨습니다. 마치 인간이 살고 있지 않은 세상은 상상할 수도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하느님께서 노아를 구하실 때 동물과 식물도 파멸에서 구하셨다는 것은 흥미롭습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홍수의 물이 다 빠졌을 때 하느님께서는 노아와 그의 후손뿐 아니라 다른 모든 생물과 계약을 세우셨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이번에도 지상 재화의 사용에 대한 제약을 두십니다. “나는 이제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준다. 그러나 피가 있는 고기를 그대로 먹어서는 안 된다. 피는 곧 그 생명이다.” 여기서 우리는 창조의 순간과 마찬가지로 다시 한 번 하느님과 피조물, 인간의 행동과 나머지 피조물 사이의 동일한 관계와 제약을 알게 됩니다.

호세아서에서도 하느님께서는 당신 백성과 계약을 세우시지만, “이 땅에는 사랑하는 자도, 신실한 자도 없고 이 하느님을 알아주는 자 또한 없어” 그 계약을 무너뜨리십니다. 그 결과는 어떠합니까? 사람들이 고통 받고 신음할 뿐만 아니라 모든 생물 또한 씨가 마르게 됩니다. 이러한 짤막한 세 본문을 통하여 우리는 인간 행동과 나머지 세상의 관계가 얼마나 밀접한지 알 수 있습니다. 인간이 자신이 하느님께 의존하고 있음을 인식하지 않으려고 할 때, 신비로운 방식으로 모든 피조물이 고통을 받게 됩니다. 창조는 하느님, 인간, 세상이라는 상호 관계로 이루어진 전체를 형성하기 때문입니다.

 

인간과 세상의 구원

하느님께서는 이 세상과 당신의 피조물들을 너무도 사랑하셔서 “그리스도를 내세워 하늘과 땅의 만물을 당신과 화해시켜” 주시려고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형상이시며 만물에 앞서 태어나신” 당신 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모든 피조물은 예수님의 이러한 화해 행위와 어떻게든 연관되어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온갖 지혜와 총명을 넘치도록 주셔서 당신의 심오한 뜻을 알게 해 주셨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를 시켜 이루시려고 하느님께서 미리 세워 놓으셨던 계획대로 된 것으로서 때가 차면 이 계획이 이루어져서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것이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여 하나가 될 것입니다.” 우리는 로마서의 잘 알려진 구절에서도 이것이 더욱 명시적으로 표현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모든 피조물은 하느님의 자녀가 나타나기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습니다. …… 곧 피조물에게도 멸망의 사슬에서 풀려나서 하느님의 자녀들이 누리는 영광스러운 자유에 참여할 날이 올 것입니다.” 이러한 모든 피조물의 자유는 인간이 하느님과 이루는 화해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습니다.

 

새 창조

성서에 나타나는 인간과 세상의 관계를 이렇게 간략하게 개관하여 볼 때, 이미 왔고 앞으로 올 시간의 끝, 곧 ‘새 창조’의 시간을 기다리는 것은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는 이사야서에서 메시아의 시대가 올 때 인간과 자연 사이에 이루어질 새로운 조화가 풍부한 표상으로 그려져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이 올 것입니다. 요한 묵시록에서는 흥미롭고 구체적인 사실 한 가지를 덧붙이고 있습니다. 새 예루살렘이 하늘에서 내려올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이 주제에 대하여 이보다 더 흥미진진한 표현이 있겠습니까? 새 예루살렘! 도시는 인간의 활동을 탁월하게 표현하는 표상입니다. 또한 지금 도시는 인간이 나머지 피조물을 무절제하게 사용하여 빚어진 모든 끔찍한 결과의 중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참고> 「찬미받으소서」, 238~240항(삼위일체와 피조물들의 상호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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