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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에세이

[하느님의 눈짓] 18. 도시의 광야

황사가 도시를 가득 채운 날이면 외출할 엄두가 나지 않습니다. 봄철에 자주 발생하는 황사는 중국 북부와 고비 사막의 건조한 벌판이 얼었다가 녹으며 먼지 바람을 일으키기 때문이랍니다. 땅과 호수가 점차 사막으로 변해가는 현상은 지구의 온난화로 인한 대표적 재앙의 하나로 알려져 있고, 사하라 지역에서는 20세기 이후에 숲이 사라지고 물이 말라버린 사막이 남쪽으로 200~300㎞나 확장되었다고 전해집니다. 세상의 모든 것이 연결되어 있음을 생각해 보면, 나에게 닥친 황사 또한 내가 배출한 온실가스가 돌고 돌아 다시 내게 온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잠시 눈을 돌려 주변을 바라보면, 사막과도 같은 황량한 광야를 수천㎞ 떨어진 먼 곳이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는 도시의 한가운데에서 발견하게 됩니다.

 

을지로, 테헤란로, 가산디지털로 등 큰길 양옆으로 높은 빌딩이 가득합니다. 아스팔트 도로 위에는 차들이 꼬리를 물고 있고, 퀵서비스 오토바이가 그 틈을 뚫고 시간을 다투고 있습니다. 점심시간이 되면 빌딩으로부터 사원증을 목에 건 사람들이 쏟아져 나옵니다. 스펀지에 물이 흡수되듯 골목골목의 식당으로 스며들던 사람들은 잠시 후 테이크아웃 커피를 한 잔씩 손에 들고 다시 빌딩으로 삼삼오오 제자리를 찾아 돌아갑니다. 새벽 다섯 시에 일어나 버스에 몸을 실었던 이들은 해가 지고 아홉 시 열 시가 되어서야 다시 오아시스 같은 아파트로 찾아듭니다. 겉으로는 문명 세계의 모습으로 보이지만, 영적으로는 황량하고 외로운, 짐승들이 부르짖는 벌판과 다를 것이 없는 광야입니다. 따뜻한 위로보다 거친 경쟁과 불안과 유혹이 난무하는 이곳은, 수년간 취업 재수를 하며 아르바이트로 불안한 삶을 이어가는 젊은이에게는 온몸을 던져 담기고 싶은 욕망의 장소이기도 합니다.

 

성경은 광야에서의 삶을 전하고 있습니다. 탈출 이후 광야의 삶은 목마르고 배고프고 위험했지만, 하느님은 ‘저마다 먹을 만큼’(탈출 16,16) ‘만나’를 내려주셨습니다. 하지만 불안한 마음의 이스라엘은 하느님을 배신하고 풍요의 신인 ‘바알’을 숭배하기 시작했습니다.(민수 25장) 거친 광야와 같은 오늘날 잿빛 빌딩의 도시에서, 지금 우리는 오직 경제적 풍요와 엑스터시적 쾌락의 ‘바알’을 숭배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잠시 생각을 모아봅니다.

 

욕망과 혼돈 그리고 공허의 장소 같은 도시의 일터지만, 성령에 이끌려 광야로 나가시고 유혹을 받으신(마태 4,1-11) 주님을 생각하며 용기를 얻습니다. 주식과 비트코인의 대박을 꿈꾸는 광야의 황량함은 나 자신의 한계를 절감하게 만들기도 하지만, 내면을 성찰하고 침잠하여 하느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자리를 마련해 주기도 합니다. 지하철 안이 묵상의 자리가 되고, 아스팔트 도로가 수도원의 회랑이 되고, 사각형 사무실이 주님을 예배하는 나의 성당이 되어 도시의 광야에서 주님과 함께 살아가는 방법을 생각해 봅니다. 마침내 고독과 단절의 장소가 친교와 축제로 승화되어 광야의 진정한 가치가 실현될 순간을 기대합니다.

 

지구의 사막화를 막아내기 위하여 당장 최선의 방법은 조림사업입니다. 영적인 사막화도 함께 걱정한다면, 도심 속의 성당은 사막에 나무를 심는 심정으로 이 광야의 유목민을 위한 자리를 마련하는데 주저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어서 팬데믹의 시대가 지나가서, 점심 식사 후 잠깐의 묵상을 위한 장소로, 친구들과 차 한 잔을 나눌 수 있는 쉼터로, 마당 열린 성당을 보게 되기를 기다립니다. 영적으로 목마른 이들에게 오아시스가 되어 줄 작은 경당을 빌딩 숲 한구석에서 발견할 수 있다면 더없이 반가울 것 같습니다.

 

하늘땅물벗 홍태희(스테파노) 반석벗(회장)

출처: [생활 속 생태 영성, 하느님의 눈짓] 18. 도시의 광야 | 가톨릭평화신문 (cpbc.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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