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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에세이

[하느님의 눈짓] 24. 게으름에 대한 변명

백신을 맞느라, 주말마다 돌보던 텃밭을 한 주 건너 보름 만에 찾았습니다. 고추와 비트의 골 사이로 자란 풀의 기세에 제 기가 먼저 꺾였습니다. 다행히 비 온 후라 땅이 부드러워 제초작업은 힘이 덜 들어갔지만, 꼬박 이틀을 고춧대 올리고 풀과 씨름을 하였더니 온몸이 무거워집니다. 옆집 밭은 깨끗하게 정리되어 있는데 뱀이 나올 듯 웃자란 풀숲으로 변해버린 내 밭이 부끄럽기만 합니다. 그런데 힘이 부쳐 어쩔 수 없습니다. 그냥 ‘게으른 농부’가 되기로 하고 대충 일어섭니다.

요즘의 속도 경쟁은 가속도가 붙어 따라잡기 힘든 지경입니다. 직장생활을 시작할 무렵에는 모든 문서는 손으로 작성하며 카시오 계산기가 첨단의 무기였습니다. 286, 386 퍼스컴을 거쳐 어느 순간 벽돌 휴대폰을 만나 문명에 감탄했었습니다. 이어서 윈도우가 등장하고 인터넷의 시대가 오더니 조그만 스마트폰 안으로 세상이 모두 들어앉게 되었습니다. 인공지능, 4차 산업혁명 하는 용어는,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게으른 농부가 되기로 한 마음과 다를 것 없는 체념과 홀가분함으로 가라앉곤 합니다. 보이지 않는 것을 믿는데 그렇게 인색하던 인간이 언제부턴가 가상의 세계에서 실체를 찾는 것에 골몰하는 모습으로 바뀐 것이 신기할 뿐입니다.

육체적인 것이든 지적인 것이든 게으름이란 우선 부정적으로 들립니다. ‘새벽종이 울렸네…’가 아침부터 마을과 학교에서 울려 퍼지고, 우등상보다 개근상이 더 훌륭하다고 강조하던 선생님의 뜻을 헤아리던 시절부터 근면 성실하게 최선을 다하는 것을 곧 선으로 이해하며 자랐습니다. 진학, 취업, 직장생활 등 모든 것이 무한 경쟁이었던 사회에서 게으름은 죄책감을 불러일으켰고, 돌이켜 보니 어린 시절 고해성사의 단골 목록이기도 했습니다. 시대의 속도를 따라잡기에 게으를 수밖에 없게 된 체력과 지력을 마주하며, 이제 무엇인가 변명이라도 해야만 할 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

복음의 선한 포도밭 주인의 비유(마태 20,1-16)를 접할 때마다 인간의 셈법과 다른 하느님의 마음을 봅니다. 포도밭 일꾼이 아침 일찍 왔던지, 저녁이 다 돼서야 왔던지, 주인은 같은 품삯을 지불합니다. 공정이 시대의 화두가 된 요즈음의 눈으로, 하느님의 품삯 계산 방식은 공평하고 정의로운 경제의 논리와 맞지 않아 보입니다. 그렇지만 맨 나중에 온 사람에게도 같은 품삯을 지불하고 싶은 하느님 마음은 심지어 꼴찌가 첫째 되고 첫째가 꼴찌 될 것이라고 구원 경륜의 이치를 밝히십니다. 부지런히 앞서가는 열심한 사람만을 구원하시는 하느님이 아니라 온 우주의 가장 보잘것없는 티끌까지 챙기시는 하느님의 마음을 생각하면, 세상의 속도에 게을러지며 불안함을 느꼈던 마음이 한결 편안해집니다.

137억 년의 우주 나이에서 5000년에 불과한 인간의 문명이란 오랜 창조 역사에 이제 막 등장한 상태일 뿐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인류가 필사적으로 매달리는 기술 문명의 속도 경쟁이야말로 하느님의 창조 세계에 불안을 던져주고 있습니다. “속도는 사유를 증발시킨다.” 어느 수녀님이 단정한 글자체로 나무판에 써 주셨던 말씀이 새삼 떠오릅니다. 게으름으로 느껴질 수도 있는 느림은 속도가 줄 수 없는 성찰의 기회를 줍니다. 목적을 알 수 없는 피로와 과속의 시대에 창조 세계를 위하여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느림과 쉼의 게으름일 수 있지 않을까요? 바쁘게 달리는 순간보다 느려지고 게을러지는 순간에서야 비로소 하느님을 만나고 느끼며 대화할 수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늘땅물벗 홍태희(스테파노) 반석벗(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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