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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에세이

[하느님의 눈짓] 20. 삼위일체 하느님

저마다 살기 바쁜 세상에서 “벗을 위하여 제 목숨을 바치는” 그런 사랑의 마음을 갖기는 쉽지 않습니다. 청춘의 연애 감정이 세상과 바꿀 수 있는 열정을 동반하는 것이라면, 부모로서 자식에 대한 마음은 나를 기꺼이 던질 수 있는 좀 더 깊은 사랑일 것입니다. 갓 출산한 아이를 보면서 처음 느꼈던 강렬한 끌림은 하느님의 마음을 부분이나마 느낄 수 있었던 은총이라 생각됩니다. 대상이 없이 사랑은 존재할 수 없습니다. 나 홀로 사랑이라는 말은 이미 그 자체가 모순입니다. 하느님이 모든 곳에 직접 계실 수가 없어서 ‘어머니’를 보냈다는 말처럼, 자식을 향한 부모의 사랑은 이타적 사랑의 절정일 것입니다.

하지만 봉준호 감독의 영화 ‘마더’는 맹목적인 모성의 일그러진 뒷모습을 보여줍니다. 세상의 많은 부모가 그런 것처럼 자식을 향한 최고의 사랑이 그들만의 것이 되는 순간, 그것은 제삼자의 세상을 짓밟는 이기적 ‘악’이 되는 것을 쉽게 경험합니다. 타인을 희생시키며 그들만이 나누는 사랑은 온전한 사랑이라 할 수 없을 것입니다.

12세기 교회의 영성가였던 성 빅토르의 리처드는 사랑 자체이신 하느님을 묵상했습니다. 충만한 애덕(愛德)의 하느님이 홀로 고독하게 머무시는 것은 상상할 수 없었습니다. 대상이 있어야 하는 것이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창조물은 불완전한 존재일 수밖에 없으므로, 완전 자체이신 하느님의 사랑을 위해서는 그에 맞갖은 완전한 다른 신적 인격이 있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둘만의 사랑이 온전한 사랑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사랑은 그것을 공유하는 제삼의 신적 인격과 함께함으로써 비로소 완성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므로 온전한 사랑의 하느님은 필연적으로 세 위격으로 존재하며, 세 위격의 친교가 최고의 사랑으로 조화롭게 되어 하나의 불꽃으로 타오르는 것, 그것을 삼위일체 하느님으로 묵상하였습니다.

계절이 벌써 6월로 접어듭니다. 이제 들판은 젊은 생명력으로 솟아오르고 있습니다. 매실나무에 맺힌 열매가 몸집을 키우고 있고, 옥수수는 제 키의 절반 정도로 자라 올랐습니다. 초파일 무렵 탐스러운 꽃을 보여주던 불두화 잎에는 이름을 알 수 없는 애벌레가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교회의 여러 영성가는 하느님을 발견하기 위해서 나무와 꽃과 애벌레, 해, 달 등 소리 없이 자라는 자연을 보라고 말합니다. 작고 보잘것없는 창조물은 없으며, 모두가 저마다 좋으신 하느님의 모습을 담고 있습니다. 홀로 높으시고 전지전능하시며 유일한 심판자 하느님의 모습은 두려운 황제를 생각나게 하지만, 성부 성자 성령께서 서로 사랑하고 조화를 이루어 하나로 일치하는 삼위일체 하느님을 생각하면, 질서를 따라 저마다의 방식으로 서로 연결되어 조화를 이루며 살아가는 자연의 세상이 보입니다.

온갖 생명을 키우고 열매 맺도록 하시는 하느님, 인간을 하느님과 자연과 화해시키시는 하느님, 생명력과 지혜로 세상을 가꾸어 가는 하느님, 어렵기만 한 삼위일체 교리가 세상의 생태계가 살아가는 모습을 통하면 이해가 될 것 같습니다. 하느님은 서로 다른 세 분이 아니라 여러 방식으로 세상에 살아계시는 한 분 하느님이심을 알기 때문입니다. 자연을 마음대로 훼손하거나, 누군가의 복종을 바라거나, 위치에 따른 ‘갑질’을 서슴지 않는다면, 그것이 비록 가정이나 교회일지라도 하느님 모습은 아닐 것입니다.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은 서로의 존재와 역할을 존중하고 사랑으로 일치를 이루어 하나가 되는, 당신의 방식으로 세상이 돌아가길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늘땅물벗 홍태희(스테파노) 반석벗(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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