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의 눈짓] 25. 내 눈의 들보
맹자를 공부하다 ‘소는 보았지만, 양은 보지 못했다’는 구절에 눈이 멈추게 되었습니다. 제물로 죽이려는 소가 측은한 마음이 들어 놓아주고 양으로 대신하도록 한 이야기입니다. 그러면 양은 죽어도 괜찮은지 질문이 듭니다. 소는 불쌍히 끌려가는 것을 보았고 양은 보지 못하였으니, 내가 직접 느끼고 경험하는 가까운 현실부터 충실한 것이 실제적인 사랑의 마음이라는 교훈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어서 맹자는 ‘내 집안의 어른을 공경하는 마음이 확장되어 타인의 어른까지 공경하게 되는 것’을 사랑의 실천 원리로 제시합니다. 현실에서 직접 느끼는 살아있는 마음에서 시작하여 차츰 주변과 이웃으로 사랑을 확장하여 가는 것이 진정성 있는 실천의 이치라는 가르침으로 생각됩니다.
그리스도인이 생태 문제에 민감하게 되는 것은, 취약해진 창조물에 대한 경험이 안타까운 마음을 불러일으키며 출발할 것입니다. 그것이 내면의 회심과 생활 방식의 변화를 가져오고, 차츰 주변 사회와 자연으로 공감의 범위를 넓혀가며 모든 창조물이 하느님 안에서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는 의식에 이르게 됩니다. 그러므로 가장 가까운 곳에 배려하는 사랑의 마음을 갖지 못하면서 자연을 사랑한다는 것은 거짓일 수 있습니다. 간혹 환경과 생태 문제를 거론하는 것에 관하여 불편함을 느끼는 분을 봅니다. 그분들과 대화를 나누어 보면, 환경과 생태 현실이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해서가 아니라 그 접근 방식에 대한 의견이 다른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오히려 생태적 삶을 이야기 하면서 가르치려는 태도를 보인다거나 다양한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는 이념적 접근이 대화를 막는 것은 아닐까 생각됩니다.
자연의 조화로운 질서를 통하여 인간 사회의 바람직한 관계의 원리를 배움과 동시에, 일상을 함께 살아가는 가족과 일터 그리고 교회 공동체의 생태적 관계가 주변의 자연에 대한 사랑의 마음으로 확산해 가는 것이 생태 영성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식이 잘못을 저지를 때마다 부모는 자신의 어떤 잘못된 모습이 자식에게 영향을 주었을까 돌아보게 됩니다. 창조 세계가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었다는 확신은 생태 위기의 원인이 나로부터 비롯된다는 점을 깨우쳐 주고, 생태적 회심이란 나 자신의 실제 삶에서 출발하지 않을 수 없다는 생각으로 이끌어 줍니다.
작년 말, 일상을 살아가는 생태 영성에 대한 에세이를 부탁받고 고민했던 기억이 납니다. 접시 바닥만 한 깊이도 안 되는 성찰의 능력으로 어떻게 창조물 안에 살아계신 하느님을 표현할 수 있을까 걱정이 태산 같았지만, 기도하면 들어주시는 하느님이 당신의 눈짓을 찡긋해 끌어 주시리라 믿으며 한 걸음씩 발을 떼어 본 지 벌써 6개월이 지났습니다. 저에게는 은총의 시간이었지만 독자분들께 누가 된 시간은 아니었는지 걱정과 함께 감사를 드립니다. 오늘 복음에서 “위선자야,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마태 7,5)라고 호통치시는 구절이, 쏟아낸 많은 말에 대하여 스스로 부끄러워하라는 말씀으로 들려옵니다.
돌이켜보니, 그동안 창조 세계 안에 당신을 드러내시며 일상에 살아계신 하느님을 표현하고자 하였던 제 글쓰기가 한없이 미숙했음을 느낍니다. 나아가 현대에 당면한 생태 문제에 대하여 감수성을 갖는 것이 창조주 하느님을 향한 신앙 차원의 문제이고, 그 회개와 실천이 이 세대가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 선교라는 것을 전하는 것에도 많이 부족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성령께서 그 부족을 채워주셨기를 기도드릴 뿐입니다.
하늘땅물벗 홍태희(스테파노) 반석벗(회장)